文學, 語學

姜鏞訖氏의 웨스튼.해(Westen Hat)을 讀하고 - 洪曉民

이강기 2015. 10. 1. 21:51
잡지명 삼천리 제16호
호수 제16호
발행년월일 1931-06-01
기사제목 姜鏞訖氏의 웨스튼.해(Westen Hat)을 讀하고
필자 洪曉民
기사형태 문예평론

亞米利加 紐育에서 發行하는 『亞細亞』(Asia)라는 雜誌에 우리 朝鮮人의 原稿가 올나잇다. 이 消息을 듯고 나는 그 親舊에게 그 雜誌를 어더보기를 付托하야 僥倖으로 그 雜誌는 내손에 들어와섯다.
나는 實로히 깃붐으로 읽지 아니치 못하엿다. 그것은 나의 寡讀, 寡聞의 탓인지는 몰으겟스나 日本에 잇는 親舊 몃몃이 日文으로 글을 써서 日文雜誌에 登載한 것은 여러번 보앗스나 이제껏 耶蘇敎的書類을 除하고는 朝鮮사람으로서는 外國雜誌에 글을 썻다는 것은 매우 드물게 보앗든 까닭이다. 아니 일즉이 東亞日報에서 英文欄을 設置하야 橫說竪說의 飜譯, 或은
卞榮泰, 李灌鎔諸氏의 論文은 보앗스나 小說體, 傳記體로는 이번이 처음이엇든 까닭이다.
그러면 『웨스텐.햇』(Westen Het)이란 무엇인가 한번 그의 梗槪를 말하고 나의 所感을 이야기 하기로 하자.
朝鮮의 北쪽 『송둔지』에서 이 姜氏가 자러온 家庭이야기로부터 始作하야 中流以上의 家庭이라는 좀 점잔은 그야말로 行世하는〈78〉 집이엇섯다. 그집에는 姜氏의 아버지 姜氏의 三寸, 姜氏의 할머니, 姜氏의 아주머니等 만흔 人物이 나온다. 同時에 姜氏가 漢文私塾에 단이어 늙은에게 工夫하다가 하이카라 三寸博士를 딸하 서울 올나와서 머리를 깍고 西洋갓(Westen Hat)을 썻다는 것이 『亞細亞』 今年新年號의 所載이다.
그다음 亞細亞 2월호는 그만 내손에 드러오지 못하얏고 또 그다음 3월호가 내손에 드러오게 되어 그러케 組織的으로 못읽게 된것만은 遺憾이나 大體로 나는 姜氏의 自?傳이 너무 無氣力한데 놀내지 아니할 수 업스며 그다음은 卽 朝鮮의 것을 西洋化하기에 애쓰는 것 가튼곳이 너무 만흔 것이다. 그러고 그 外에도 社會的 變遷의 不徹底한 點과 그다음 朝鮮人은 散漫的이오 無秩序的인 것 가티 만드러 논 것이다.
첫재로 우리는 그의 漢文私塾先生에 대하야 너무나 조치 못한 글句가 만흔 것이다. 要컨대 漢文私塾의 先生이 老昏하고, 無氣力하고, 그야말로, 코물 흘이는 先生이 업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코물先生이라고 別名을 지엇다든가 老子思想을 가진 三寸에 不徹底한 行動을 愉快하게 取扱하엿다든가 이러한 것이 이 作品속에서 만히 볼수 잇다. 말하자면 作者自身이 滋味잇게 쓰노라하야서 이러케 썻는지는 몰으나 너무나 朝鮮사람으로서 朝鮮의 美點보다도 缺點이야기가 만흔 것을 늣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때 朝鮮의 社會的 變遷에 대하야 좀더 徹底히 써주엇더면 하는 것이다. 要컨대〈79〉 그때에 西洋에서 朝鮮에 대한 態度와 또한편 侵略勢力에 組織的 行動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梁起鐸이니 尹致昊라고 하는 분들이 演說이나 하고 건둥건둥 그때의 社會情勢를 그려논 것이다.
우리는 일즉이 米國軍人通의 記者 『팔머-』(Palmer)란 者이 『亞細亞의 鬪鷄場에서』(In the Asiatic Cockpit)라는 紀行文에서 朝鮮人은 沐浴을 달포가 되어도 하지 안코 이(?)를 잡는다는 둥 하는 文句와 그의 態度에 憤慨하지 안엇든가. 그러나 朝鮮人으로서 朝鮮人의 家庭이 그러케 散漫的이오 多角的인 點을 볼 때 어떠케 생각되는가. 또한 自己를 가르첫다는 先生에게 코물(Nose Water)이라는 別名을 올이고 이 先生의 淨치 안흔 것을 말하엿스니 이 『달머-』의 態度에서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 『웨스텐.햇』의 姜氏의 意圖는 全혀 朝鮮의 風俗, 習慣, 情操를 나(姜自身)라는 一人稱代名詞를 使用하야 自?傳이면서 西洋人에게 알여주려고 하는데 잇섯다고 보여진다. 그레데 먼저도 이야기 하엿거니와 朝鮮의 무슨 美風, 良俗과 禮儀잇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
그다음 2월호를 보지 못하엿슴으로 2월호에 대하야는 더 이야기하고자 안커니와 3월호에 드러가 그가 日本에서 열여섯살에 歸國할때에 車中에서 한 戀愛라든지 그 自身이 女子에 대한 態度가 어찌 그러케 低級한것인가. 西洋에서 女子에게 무엇을 들어다 준다든가 女子에게 屈해 보이는 것이 禮인지(?)는 몰으나 또한 그래서 썻(書)는지도 몰으거니와 朝鮮에서는 그 自身도 아는바와 가티 女子에 대한 態度가 그러치 아니한 것을 잘 알것이다. 또한 그가 慶州에 드러 新羅古都을 차젓고 거기에 대한 좀더 新羅의 東洋에서 雄飛하든 것을 썻드면 어떠하엿슬가. 나는 다만 그저 3월호에는 金剛山에 대한 紹介박게 別로히 불것이 업는 것을 늣긴다. 또한 『옥동야』라는 四寸누이동생에 잇서서도 別로히 조흔 態度라고는 할수 업다.
이다음 4월호에는 西伯利亞를 거처 米國에 가는 것을 쓴다고 하니 그때 또다시 좀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만한다.
그런데 끗흐로 잠간 더 말하고자하는 것은 姜氏의 著『草가집웅』(Grass Roof)이라는 것이 나왓다는 것을 東亞日報 讀書欄에서 보앗는데 그것이 이 自?傳이나 아닌지 만약에 이 自?傳이면 우리는 매우 不愉快를 늣기지 안흘수 업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作品이 너무나 樣式主義(Mannerism)에 拘泥되어 朝鮮人에게는 別로히 有益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西洋人에게 좃토록 되엇고 내밋드러 남보기에 글이라는데 지나지 안는다.〈80〉
〈7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