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颱風 속의 人間

이강기 2015. 9. 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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颱風 속의 人間
   - 現代 小說論 斷片 -


            - 金東錫

 

 

   現代에 있어서 小說은 옛날 얘기가 아니다. 아니, 옛날 얘기조차 現代에 存在하는 옛날 얘기는 現代的인 存在理由가 있을 것이 아니냐. 現代小說이란 現代人의 人生觀일진댄 現代社會에서 進步的인 行動을 해 본 體驗이 없이 조그만 頭腦에서 쥐어 짜 내는 小說 - 그런 小說은 小說이 아니다. 어떤 小說이 시방 朝鮮에서 要求되느냐? 이에 對한 對答 대신에 現代小說의 본보기라 볼 수 있는 콘래드의「颱風」을 紹介하려는 것이다.
   英文學에는 아직 이렇다 할 散文이 없었다. 세익스피어가 代表하는 엘리자베스朝의 昻揚된 貴族精神이 자자들다가 워즈워즈 等 十九世紀의 浪漫時代를 만나 다시 한번 크게 울리더니 아직도 餘韻을 끌고 있어서 二十世紀에 이르러서도 英國의 小說은「詩」의 影響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이스의「율리시즈」가 이것을 具體的으로 證明하고 있다.
   그러던 英文學에서 콘래드같은 散文精神을 낳았다는 것은 奇蹟과 같다. 허긴 콘래드는 원래가 폴란드 사람이다. 歐羅巴의 暴風地帶인 波蘭, 이 波蘭을 母國으로 가진 콘래드가「颱風」이라는 小說을 썼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興味있는 事實이 아닐 수 없다. 시방 世界는 安靜을 얻으려는 動搖속에 있다. 朝鮮 또한 이 歷史的인 물결 위에 출렁거리고 있는 조그만 배「南山」과 같다.「南山」의 船長이 颱風속에서 어떻게 行動했나 하는 것은 시방 朝鮮의 指導者로 自處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敎訓이 될 것이다.
   「리어王」이 暴風雨의 詩라면 콘래드의「颱風」은 暴風怒濤의 散文이다.「나아씨서스의 黑人」에서는 아직도 콘래드가 主觀을 蟬脫하지 못하고「우리」라는 말을 쓰다가 끝에 가서는 作者의 꼬리가 露骨的으로 나타나서「나」라고 明白히 一人稱으로 썼다. 물론 이 作品이 私小說과는 雲泥의 差가 있지만「颱風」에 比하면 散文精神에 徹底하지 못했다. 허긴 도처에 배와 바다의 詩가 넘쳐흐르는 만치 颱風보다는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
   그러나 小說의 極致는「詩」를 不定하고 레스(物)에 肉迫하는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意味에서「颱風」은 完璧을 이룬 作品이다. 거기는 自然과 一致된 人間 맼 훠가 있다. 그는 事物을 指示하는 外에 言語를 위한 言語의 存在理由를 모르는 徹底한 行動人이다. 그러므로 詩에서 뺄 수 없는 比喩를 嘲笑한다. 一等運轉士 쥬크스가 무더운 것을 形容하여
「꼭 담요로 내 머리를 싸 맨 것 같습니다.」
하니까 船長 맼 훠는 그것을 比喩로 理解하지 못하는지라
「누가 담요로 자네 머리를 싸맨 일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무슨 까닭이었나?」
하고 反問한다. 쥬크스가 하도 어이없어
「이를테면 그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고 하니까 船長은 憤慨하여 가로되
「자네들은 쓸데없이 지껄이거든!」
콘래드는 다시「이렇게 船長」맼 훠는 말에서 比喩의 使用을 反對하였다.」고 註하였다.
   主人公이 이와 같이 散文精神에 투철하니까 이 小說이 散文으로 成功할 수 있었다. 二等運轉士를 보라. 自我를 송두리째 통틀어 自然 속에 投射하지 못하고 自己의 感情과 固執 때문에 얼마나 초라하고 옹졸한 人間이 되어버렸나! 颱風 속에서 당장 깨져 없어질 것 같은「南山」號를 조금도 마음의 動搖를 일으키지 않고 冷徹하게 指揮하는 船長은 英雄과 같은데 自然의 威脅 앞에 무서워 떠는 이 人間은 卑劣하기 짝이 없고 결국 港口에 닿자마자 내쫓기니까 뒤돌아보며 배에다 대고 주먹질을 한다. 이것이 세익스피어의 劇이라면 正反對로 맼 훠처럼 感情에 動하지 않는 人物은 에드먼드 같은 極惡의 人物로 되었을 것이다. 「詩」에서 不定되는 것이 散文에선 肯定된다. 세익스피어劇에서는「詩」가 없으면 倫理도 없어지지만「颱風」은「詩」없는 倫理를 確立했다. 맼 훠가 없었드면「南山」號는 苛酷한 自然 - 아니, 卑劣한 人間性 - 의 犧牲이 되어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을 것이 아니냐. 汽船은 現代生活의 死活을 쥐고 있느니 만치 船長 맼 훠는「善」을 代表하는 人物이며「生活」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 現代에서는 善人이다.
   科學이 人間性을 抽象해 버리듯이 散文精神도 人間性을 拒否한다. 아니 이「人間性」이라는 觀念부터 修正받아야 될 때는 왔다. 리어王처럼 憤怒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戀愛하는 사람에게만 人間性이 許與된다면 오늘날 朝鮮에서도, 世界的인 動搖 속에서 眞空과 같은 獨立을 꾀하여야 되는 朝鮮에서도 頑固덩어리 영감님들이나 鍾路 난봉꾼만이 人間性을 갖게 될 것이오 時代를 떠받치고 나가는 行動人들이나 科學者에겐 人間性이 拒否될 것이다.
   콘래드는「颱風」속에서 船長과 그 외 몇 사람에게만 이 새로운 意味의 人間性을 賦與
했다. 배가 이리 뒤집힐 듯 저리 뒤집힐 듯 動搖하는대로 굴러다니는 돈을 줏으려 서로 쥐어뜯고 싸우는 苦力들은 野獸와 같다. 무서워서 웅크리고 있는 船夫들은 하치않은 人間들이다. 人間의 人間다운 行動이 빛날 때는 難破船같은 不安動搖의 境遇이다. 맼 훠를 보라. 自己의 周圍環境과 一致함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빈틈없는 그의 一擧手 一投足, 그가 없었드면   「南山」號은 거기 탄 모든 人間과 더불어 漁服에 장사지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觀察하고 把握하고 實踐하는 사람이 現代의 기둥 될 人物이다. 이러한 人物이 없이 現代朝鮮은 일어설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런 人物을 登場시키지 않고 現代朝鮮小說은 成立할 수 없다. 그럴려면 누구보다 먼저 小說家 自身이 觀察하고 把握하고 實踐하라. 大衆이「解放」에 一喜하고「託治」에 一悲하는 것은 大衆으로서 그럴법한 일이지만 그 大衆에게 살아 나갈 바 길을 가리켜 준다는 作家로서 大衆보다 앞서서 輕擧妄動하는 朝鮮의 現實을 볼 때 寒心하지 않을 수 없다.「民族」이라는 小說을 新聞에다 發表하고 있는 朴鍾和氏가 다섯 달 동안에 發表한 詩를 比較해 보면 政治的 主見이 없음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自由新聞 新年號에 發表된「痛哭」이라는 詩에서 氏는

 

해방의 기꺼움이
다섯 달이 채 못되서
民族은 또다시
千길 地獄으로 떨어진다.

 

했으니, 朝鮮民族이 언제 天堂에 올라갔었다는 말인가. 八月十五일날 獨立萬歲를 부르고 좋아하는 것이나「託治」의 報道를 듣고 痛哭하는 것이나「民族」이라는 小說을 新聞에 發表하는 作家로선 三省해야 할 일이다. 朝鮮의 歷史文獻만 읽은 것만 가지고는 朝鮮民族의 運命을 大衆앞에서 떠들어 댈 資格은 없다. 大衆속에 들어가 實踐한 사람의 血管에만 大衆의 要求가 피흐르고 있고 이 피는 바로 世界史와 連結되어 있는 것이다. 觀念的인 小說家는 觀念的인 政治家와 더불어 危險한 存在이다.
   콘래드는 二十一年동안이나 水夫로서 또는 船長으로서 바다와 바람과 싸웠다. 자기 집 사랑에서 일찌감치 大小說家가 되어버리는 朝鮮文壇에서「颱風」은 좋은 선물이며 산 小說標本이다. 農民만이 農民의 小說을 쓸 수 있을 것이오 勞動者만이 勞動者의 小說을 쓸 수 있을 것이다. 原始的인 人間性을 主題하던 過去의 文學 - 또 現代도 詩文學은 變함 있을 리 없다 - 은 몰라도 勞動과 科學이 文明의 基調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人間精神도 科學과 勞動의 影響下에 있는 現代에 있어서 散文精神 卽 客觀世界를 科學的으로 把握表現한 文學이 아니고는 時代를 代辯하는 小說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小說보다 小說의 主人公이 먼저 實在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시방 朝鮮은 누구보다도 颱風속에서 南山號를 難破시키지 않고 無事히 港口에 가 닿게 한 맼 훠같은 人物이 必要하다. 이러한 人物이 朝鮮에도 있다. 다만 問題되는 것은 이러한 人物이 小說을 쓸 時間的 餘裕가 없다는 것이다. 이 動搖를 體驗한 사람들이 小說을 쓰게 될 때 眞正한 颱風의 散文이 誕生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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