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詩와 政治

이강기 2015. 9. 1. 22:17

詩와 政治

 


  - 李庸岳 詩「38度에서」를 읽고 -


       - 金東錫

 

   八月十五日을 契機로 해서 朝鮮의 詩는 豹變했다.「思想」이 없다고 散文家들이 白眼視하던 詩가 一朝에 政治詩로 變한 것은 解放이 낳은, 한편 기쁘고도 서글픈 現象이다. 文學少女의 詩같은 詩를 쓰던 詩人이 별안간에 革命鬪士가 된 것 같이 政治를 외치는 詩를 쓰게 된 것은 世上이 다 놀라는 바이오, 聯合軍의 餘光을 받아 환해진 달밤의 朝鮮을

오, 빛나는 祖國!
惡夢은 걷히도다
눈부신 아침은 오도다

하고 노래한 小說家의 錯覺은 그가 詩人이 아닌데 詩를 썼다는 데서 原因한 것이 아니라「純粹」를 표방하던 그가 八月十五日의 興奮에 휩쓸려 動搖했기 때문이 아닌가. 如何튼 朝鮮詩壇에도 八月十五日의 解放이 낳은「아름다운 誤謬」가 많았다 - 애시당초부터 詩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政治 브로카的인 詩人행세를 하게 된 것은 置之度外하거니와, 그러나 興奮의 물결은 지나가고 차디찬 現實의 조약돌이 드러난 오늘날 그런 過誤는 다시 容納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新朝鮮報에 이 달 열 이튿날 실린 李庸岳氏의 詩「38도에서」는 값싼 興奮의 所産이 아니오 그가 詩人으로서 自他가 公認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또 이 詩가 詩로서 흠잡을 데가 없는 이상(?) 우리가 한번 批判해 보는 것도 朝鮮詩를 위하여 無意味한 것은 아닐 것이다.「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밤 그늘이 짙어야 나른다」든가, 朝鮮의 詩人들도 스스로 反省할 때가 아닌가.


   한마디로 말하면「38도에서」는 朝鮮을 허리 동강낸 北緯 38度線을 咀呪하는 노래다. 이것은 確實히 어떤 潛在意識의 表現이라 할 수 있다.

누가 우리의 가슴에 함부로 금을 그어
강물이, 검푸른 강물이 구비 쳐 흐르느냐
모두들 국경이라고 부르는 삼십팔도에
날은 저물어 구름이 모여

이 어찌 李庸岳의 個人的 感情이랴. 허지만 이 詩는 偏見을 품고 있다. 그것이 값싼 偏見이라면 내가 評筆을 들 必要조차 없겠지만 李庸岳은 詩人이오 詩人의 偏見은 스스로 뿌리 깊을 뿐 아니라 그의 詩를 읽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뿌리를 깊이 박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 原稿를 쓰게 된 것이다. 


   먼저 38度의 本質을 말하여 두자. 詩人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38度는 美蘇 兩國이 共同責任을 져야할 것이다. 露骨的으로 말하면 38度의 線은 資本主義와 社會主義가 均衡을 얻은 實力線이다. 이 線을 없이하는 데는 세 가지 길밖에 없다. 이 線을 朝鮮北端으로 옮기든지 그와 正反對로 朝鮮南端으로 가져가든지 또는 이 線을 둘로 쪼개서 하나는 北端으로 하나는 南端으로 옮기는 것 - 卽 朝鮮이 自主獨立하는 길이다. 


   그러면 李庸岳氏에게 들어보자. 어찌해서「고향으로 통하는 단 하나의 길」은 38度 以南으로만 通하는 것이냐.

 

야폰스키가 아니오 우리는 거린채요 거리인채

라 한 氏의 心境에 同情하지않는 바 아니로되

쨉이 아니오 우리는 코리안이요 코리안

할 사람도 있을 것이 아닌가.「군정과 면사무소」는 「콤민탄트와 인민위원회」보다 더 非詩的이 아닌가. 詩人인 純粹하려면 公正無事해야 할 것이 아니냐. 氏의 感覺의 眞實性을 否認하는 것은 아니로되 어찌 나무만을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가. 哲學者 칸트는 詩人을 警戒하여 가로되「槪念이 없는 直觀은 장님이니라」하였다. 政治學이란 모든 體驗과 學問의 總決算이라야 한다.「38度」는 유우클리트的인 觀念線이 아니라 複雜多端한 現實線이다. 詩人이여 그대의 感覺을 過信하지 말지니 地球의 둥금을 우리가 感覺할 수 없듯이 38度線은 政治的으로밖에 把握할 수 없는 것이다. 시방 國際情勢를 살펴보면 비록 度數는 다를망정 38度線같은 線이 地球를 한바퀴 삥 둘렀다. 朝鮮의 38度線도 世界史의 一環으로 보아야 그 本質이 드러날 것이다. 最近 뉴욕타임스를 보니 美國이라는 紳士가 입고 있는 燕尾服의 두 꼬리를 하나는 資本家가 바른 쪽으로 잡아 다니고 또 하나는 勞動者가 왼쪽으로 잡아 다니는 漫畵가 있었다. 이는 美國에도「38度線」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如何튼「38度에서」와 같은 詩를 發表할 때는 愼重해야 할 것이다. 이 詩가 大衆에게 끼치는 政治的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李庸岳氏가 이 詩를 38度 以北에서 發表할 勇氣가 있었드면 問題는 全然 닳다. 다만 美軍과 軍政廳밖에 없는 서울에서 소련병정과 콤민탄트를 批判한댓자 돌아서서 침 뱉기지 詩人다운 態度라고는 볼 수 없다. 


   詩人이여 純粹하라. 섣불리 政治를 건드리지 말지니 數字없는 政治觀은 危險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日本帝國主義의 觀念政治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나를 그래 詩人은 모른단 말인가. 詩가 아무리 把握力이 있다해도 결국 붙잡는 것은 새요 구름이다. 政治를 論하려거든 우선 經濟學부터 工夫하라. 政治의 本質은 옷이오 집이지 새나 구름은 아니다. 차라리

이윽고 어름ㅅ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에 우줄 우줄 나설게다.
가시내야
노래도 없이 사라질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게다

한 때가 李庸岳氏는 더 詩人다웁지 아니한가. 그의 길이 分明히 워싱톤으로만 通한다면 암만해도 純粹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38度에서」는 李庸岳氏가 無心코 쓴 詩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氏로서 無意識的脫線이었다면 오히려 多幸일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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