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評論集「藝術과 生活」을 내 놓으며

이강기 2015. 9. 1. 22:55

評論集「藝術과 生活」을 내 놓으며


   - 金東錫

 

   나의 隨筆集「海邊의 詩」는 全혀 八.一五 以前에 쓴 것이며 詩集「길」또한 擧皆가 그러하다. 이를테면 나는「日帝」의 檢閱과 拷問이 무서워서 남몰래 글을 써 모아 놓고는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八.一五를 當하고보니 글보다 더 急한 것이 있었다. 쇠사슬은 풀렸으나 民族은 마음껏 움직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가 살던 安養엔 日本軍隊가 많이 남아 있었고 親日派들이 이 敗殘兵들을 믿고「日産」에 눈이 어두워져서 日軍의 銃칼로 武裝하고는 大膽하게 朝鮮의 建國을 妨害했다. 그 者들 중엔 시방은 또「反託」이니 무어니 해 가지고 愛國者를 假裝하고 떠들어대는 者들이 있지만 그때 그 者들의 氣勢란 大端했다. 日人警察이 朝鮮靑年하나를 檢擧해서 서울로 보내버려 生死가 모르게 된 일이 있었는데 郡民의 뜻으로 내가 單身 그 警備가 어마어마한 警察署에 달려가서 日人 警務主任에게 抗議를 하고 있을 즈음에 親日派들과 그들의 使嗾에 영문도 모르고 날뛰는 防衛隊員들 - 警防團과 監視哨를 이름만 고쳐서 防衛隊라고 한 것이다 - 數十名이 와 하고 몰려들더니 不問曲直 곡괭이 자루며 木劒이며 木銃이며 할 것 없이 그 놈들이 들고 온 연장으로 나를 후려갈겼다. 나는 나로서도 알 수 없게스리 아무 말 않고 얻어맞았다. 나의 머리가 文字 그대로 뻑 갈라져서 내 옴 몸이 피를 뒤집어쓰자 그 者들은 피를 보고 겁이 나서 물러났다.


   나는 不幸 中 多幸으로 살아났다. 그리하여 두어 달 동안 日本帝國主義의 殘滓를 掃蕩하기 위하여 싸웠다. 그러니 글이라고는 삐라밖에 쓸 겨를이 없었다. 八.一五 前엔 무서워서 글을 못썼다하더라도 八.一五 直後엔 왜 글을 쓰지 않았느냐 하고 異常히 여기는 讀者들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서울에 나타나서「象牙塔」이란 것을 만들어놓고 評筆을 들게 되기까지의 經過를 報告하는 바이다.


   現代를「事實의 世紀」라는 하는 것은 폴 발레리와 더불어 나도 絶代 同感이다. 文學은어떠한 種類, 어떠한 內容을 不問하고 象牙塔的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事實을 움직이는 데는 文學이 科學을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科學과 一心同體가 되는 行動에 比해선 너무나 無力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가 日久月深 갈고 닦은 機能은 文學이다. 機能에 應해서 勞動하는 것이 가장 良心的이라면 나는「象牙塔」에서 글을 쓰는 것이 나로선 제일 좋은 일일 것이다.


   이러한 見地에서 나는 부지런히 글을 썼다. 때로 象牙塔을 뛰어나가 民族問題에 부딪쳐보기도 하지만 阿片에 인이 배기듯 文學을 떠나면 허전해서 살 수 없는 나이기 때문에 금방 象牙塔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와서 글을 쓰곤 하는 것이다.
   이 評論集에 모은 글의 大部分이「象牙塔」에 發表된 것은 이러한 나의 生活態度에 緣由하는 것이다.


   讀者諸兄은 이 評論集을 읽으시고 나의 글뿐 아니라 나의 生活態度까지도 批判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昨年 八.一五에 나올 것이 이제야 나오게 된 것은 여러 가지 事情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三八 以南 朝鮮의 出版事情이 딱한 탓이었다. 그래서 나의 글이 그 동안 發展한 現實과 어긋나는 데가 생긴 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加筆함이 없이 다만 最近에 發表한 글을 몇 篇 더 넣어 版을 짠것에 對하여 나는 여러 가지로 不滿을 갖고 있다.


   끝으로 이 冊 出版에 百方 努力해 주신 博文出版社 諸兄과 大東印刷所 諸氏에게 感謝를 드리는 바이다.

 

   一九四七年 二月一日
                金  東  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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